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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좇는 인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다 읽고 나서도 쉽게 감정을 정리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유쾌한 한 남자의 이야기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인간이 ‘삶의 책임’이라는 질문 앞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자유로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크눌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흔히 미화하는 자유의 실체를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정착과 안정을 당연시하는 사회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부정한 채 떠돌기를 선택한 크눌프의 삶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불편하다.


자유와 정착, 그 대비의 구조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여기서 자유를 '사회적 틀을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정도로 정의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크눌프는 굉장히 자유로운 인물이다. 관습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 떠나고 머문다. 그의 삶은 책 속에서 등장하는 무두장이와 의사 친구를 통해 더 분명히 대비된다. 무두장이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정착해 살고 있으며, 의사 친구(마홀트) 역시 병원에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에 반해 크눌프는 안정된 삶의 기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신이 원할 때 관계를 맺고 또 스스럼없이 끊는다. 이 대비는 크눌프의 삶을 단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삶의 방식에 대한 기준을 되묻게 한다. 정착하며 안정을 택하는 삶과, 떠나며 자유를 좇는 삶 중 무엇이 더 나은가? 단지 나는 ‘안정감 안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으로서, 크눌프의 방식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무책임으로 읽히는 자유

처음에는 단순한 성향처럼 보였던 그의 떠돌이 삶은, 읽을수록 책임의 회피라는 결로 읽히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프란치스카라는 여인을 짝사랑하던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라틴어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한다. 이 선택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반복해서 되짚으며, 그 책임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후 성인이 된 크눌프는 사랑했던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생을 마감하는 일을 겪는다. 남겨진 아이는 보육원에 맡겨졌고, 그는 다시 떠나는 삶을 택한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를 기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앞선 장면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삶에 개입된 중요한 사건들을 끝내 외면하고 거리를 두려는 그의 태도는, 일관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는 환상 속에서 신을 만나 위로의 말을 듣는다. 신은 “그 여인은 한순간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죄책감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다.
이 장면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어떤 독자에게는 크눌프의 내면적 구원으로 읽힐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오랜 자기방어의 마지막 단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그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의 삶은 끝내 책임이라는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태도로 일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끝맺음의 방식이 말해주는 것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끝’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책 속에서 크눌프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고 말하며, 관계든 상황이든 언제나 먼저 끊어낸다.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가도 별다른 인사 없이 자취를 감추고, 정든 장소에서도 미련 없이 떠난다. 그에게 있어 끝은 슬픔도, 회한도 남기지 않는 무엇이었다. 마치 먼저 거리를 두는 쪽이 상처받지 않는다는 듯, 늘 자신이 먼저 선을 긋고 걸어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끝이 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끝을 ‘어떻게’ 맺는가에 대한 태도였다. 끝이란 단지 멈춤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의 시간과 감정, 의미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이 된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끝내야 할 관계와 일, 역할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그때마다 무심히 등을 돌리는 것과, 그 모든 시간을 되짚어보고 나만의 방식으로 매듭짓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또한 현실의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과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인생은 길고, 세상은 넓지만도 좁다. 언젠가 마무리한 관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다시 마주치기도 하고, 끝난 줄 알았던 일들이 어느새 다음 선택의 조건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떠났는가, 어떻게 작별했는가에 따라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래서 나는 끝을 잘 맺는 일이 단순히 미련을 줄이기 위한 감정 정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끝은 그냥 자연스럽게 오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 어딘가에 머물고, 누군가와 연결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무던한 이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떠나기로 했을 때, 그 떠남이 누구에게도 낙진처럼 남지 않기를 바란다면, 적어도 한번쯤은 그 순간을 정리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크눌프는 삶의 여러 단면을 자르듯 끊어내며 살아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 더 머물고 싶다. 관계와 시간, 감정과 의미를 천천히 정리한 뒤에야 비로소 다음을 바라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져진 마음은 나를 무겁게 하지 않으면서도, 돌아보았을 때 한 시절의 밀도로 남게 된다. 삶의 깊이는, 어쩌면 그렇게 ‘잘 끝낸 일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크눌프』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 가진 명확한 특징과 그 한계를 보여준다. 그의 선택은 자유를 지향하지만, 동시에 책임의 회피로 읽힐 여지를 남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특정 인물의 삶을 평가하기보다, 어떤 기준으로 삶을 구성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크눌프』는 그 질문을 던지는 출발점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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